가수 박재란의 인생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박재란은 1960년 ~ 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가수인데요. 박재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박재란 프로필

박재란 나이는 1938년 12월 16일생입니다. 박재란 본명은 이영숙이며, 고향은 공주이며, 경성부에서 출생했습니다. 박재란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가족과 함께 충청남도 천안에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박재란은 주한 미8군 무대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로 첫데뷔를 했습니다.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박태준에게 발탁이 되며 문하에서 음악 수련을 하며 박태준에게 박재란이라는 예명을 얻게 되었지요.


박재란은 1957년 정식 가수 데뷔를 했고, <뜰 아래 귀뚜라미>, <러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산 너머 남촌에서>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인기 가수로 거듭나게 됩니다.



박재란 둘째딸 박성신은 198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회상이라는 노래 작품으로 첫 데뷔를 하여 1년 후 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비 오는 오후>라는 노래로 가창상을 수상했습니다. 1989년 <한 번만 더>라는 노래로 히트를 하기도 했지요.



박재란 남편 이혼이유(이혼사유)

박재란 결혼은 1966년에 했습니다. 박재란이 결혼 할 당시 정상의 자리에 있는 히트 가수였기 때문에 그녀의 돌연 결혼 발표가 큰 화제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박재란 남편의 사업 실패와 외도 등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지요.(박재란 이혼이유)



결혼 13년 만에 이혼을 했는데요. <그 때만 하더라도 여자의 이혼은 한 번 죽는 것이었다>라며 이혼과 동시에 우울증을 앓아 병원까지 입원을 했다고 하지요.


박재란은 이혼의 충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쉽지 않았습니다. 불법체류 단속으로 수감생활을 하거나 사기를 당하는 등 사건이 끊이지 않았고, 그곳에서 만난 두번째 남편과 또 한 번의 이혼까지 겪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전남편의 반대로 두 딸을 한국에 남겨두고 낯선 타지에서 생활을 하던 박재란은 그곳에서도 친한 지인에게 억 대의 사기를 당해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미국에서 죽으려고 했다. 되는 것이 없었으니까. 내가 살면 뭐 하나 싶었다. 그러나 두 딸을 향한 그림움과 무대에 대한 간절함으로 버텨냈다>



미국으로 떠난 뒤 딸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던 박재란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한 신문을 통해서 둘째 딸 박성신이 가수로 데뷔를 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박재란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두 딸 앞에 선뜻 하서기 힘들었을 때 가수 현미가 나서서 두 딸에게 엄마 박재란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고 합니다. <너희 엄마 절대 죄 없다. 엄마 오해하지 마>그랬더니 딸들이 <그랬군요. 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재란 딸 박성신은 2014년 심장질환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엄마처럼 훌륭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박재란은 딸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바다를 찾아 그리움을 달랜다고 합니다.



둘째딸 박성신을 잃고 유일하게 남은 가족 큰 딸 박성은은 남편의 사업 때문에 중국으로 이민을 떠난 지가 2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박재란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자랑인 손녀, 손자들 모두 중국 북경대에서 학업을 이어가느라 1년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고 하는데요.


이런 것을 보면 박재란의 인생에 굴곡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재란은 현미, 한명숙과 함께 60년대 여가수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가수입니다. 결혼과 이혼으로 연예계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박재란은 2017년 <꼴찌면 어때서>라는 앨범을 발표하고 아직까지 현역에서 뛰고 있는데요.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네요.

박재란이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노래 들려주길 바라며, 건강하게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좋은 노래 들려주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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