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은 대한민국의 비평가로 꽤나 인지도가 높은 인물입니다.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와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를 역임했으며, 정의당 당원이었습니다.



진중권은 SNS에서 늘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인데요. 사회적 문제나 화제가 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항상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코로나19와 관련하여 마스크 착용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진중권 프로필

진중권 나이는 1963년 4월 27일생입니다. 학력은 서울대학교와 베를린자유대학을 나왔으며, 진중권 배우자로는 일본인 미와 교코가 있습니다.



진중권은 감리교 목사인 아버지와 피아노 강사인 어머니 사이에 2녀 2남 중에서 장남이자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진중권 가족 중에는 누나가 작곡가 진은숙, 음악평론가 진희숙이 있으며, 동생은 컴퓨터 프로그램머 진중걸입니다.



<누나는 한국에서 학부 끝나자마자 독일로 갔어요. 누나 남편이 핀란드 사람이예요. 20세 연하의 핀란드 남자예요. 제가 매형이라고 부르기 참 애매해서 그냥 이름 불러요. 그리고 농담으로 너도 참 인생 꼬였다는 식으로 말하곤해요. 매형은 피아니스트를 하다가 기획쪽으로 바꿔서 일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진중권 집안은 어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어렵게 성장을 했지만, 누나와 진중권 그리고 동생 모두 좋은 학교에서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하고 성장한 것 같습니다.



진중권 마스크 논란

진중권은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마스크 대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페이스북에 개제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물론 미국과 유럽 어느 곳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권장하지 않는다. 마스크를 쓰면 손으로 얼굴 만질 기회가 더 늘어난다거나 가짜 안점감을 줘서 더 위험해 외려 말린다. 이제는 마스크 사겠다고 사회적 격리 원칙까지 무시하니 더 위험해질 것이다>



이처럼 진중권은 마스크 대란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더 혼란만 가중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진중권이 비평가답게 모든 면을 조금 다르게 보는 관점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옳고 나쁘다고 언급하기는 그럴 것 같네요.


진중권 아내(부인) 미와 교코

진중권 부인은 일본인입니다. 아내와는 독일 유학 당시 어학원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요.



<독일 유학 당시 어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우연히 옆집에 살게 됐다. 당시 누나가 프랑스 파리에 가는 바람에 저 혼자 살게 되었는데 당시 옆집에 사는 아내가 매일 빵만 먹는게 불쌍해서 제가 저녁밥을 지어서 먹이고 했다. 사실 아내가 요리는 정말 못한다>


이렇게 친해져 연애도 하고 집세를 아껴보자는 마음에 3년 정도 동거를 하게 됩니다. 동거 후 자연스럽게 집안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지요. 원래 아들도 낳지 않으려고 했다고 하는데 생겨버렸다고 하지요.



진중권 아내는 일본 국적인데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려면 아내가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고 해서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중권 아들은 한국 국적과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요.


<저는 아들이 18세가 되면 한국 국적을 가지기를 희망하지만 아내는 여러모로 편리한 일본 국적을 선택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이가 18세가 되었을 때 본인이 알아서 선택하게 놔둘 생각이다> 현재 진중권 아들이 18세가 넘었기 때문에 어떤 국적을 선택했는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진중권 부인 미와 교코와 아들은 과거 독일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는데요. 현재는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떨어져 편하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내와는 독일어로 대화를 해요. 독일어가 가장 편하거든요. 물론 일본말이랑 한국말도 가끔씩 하구요.


진중권은 일본인 아내와 결혼을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과는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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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는 우여곡절이 참 많은 배우입니다. 여러 작품을 하면서 큰 인기를 끄는 중년 배우로 거듭났지만 그의 개인사는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박영규는 여러 작품을 하다가 이따금 큰 인기를 끄는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30% 이상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주말드라마 사풀인풀에 출연을 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박영규 프로필

박영규 나이는 1953년생으로 대전 출신입니다. 박영규 데뷔는 1985년 MBC 특채 탤런트로 데뷔를 했으며, 연극배우로 오랜세월을 보내다 1985년 영화 <별리>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하게 됩니다.


박영규를 대표하는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순풍산부인과>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보여주었던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성대모사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박영규 부인(아내) 이혼과 결혼

박영규는 최근 네번째 결혼을 하여 화제가 되었는데요. 박영규 첫번째 결혼은 1983년도에 결혼을 했고, 1990년년대 이혼을 하게 됩니다. 박영규 첫번째 아내는 서울예대 후배였습니다.


(순풍산부인과 박영규)


<내가 폐결핵을 앓을 때 간병해주었던 서울예대 5년 후배였어요. 같이 연극 '자 1122년'에 출연하기도 했지요.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처가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장인 장모가 이북분들이었고 평화시장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제가 그 입장이라도 허락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양가에서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제 자취방에서 비닐 옷장 놓고 신접살림을 시작했어요. 결혼 후 아이를 안고 갔는데도 인정을 안해주시더군요>



아마 당시 박영규가 가난한 연극배우였고, 이를 처가에서 반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박영규는 첫번째 부인 사이에 아들 박달을 낳게 되고 결국 1990년대 중반 이혼을 하게 됩니다. <아이와 아이 엄마가 조기 유학을 원했어요. 그래서 둘이 미국으로 보냈는데 사실상 별거였죠>


박영규 두번째 부인은 당시 톱 디자이너였던 최모씨였습니다. 박영규보다 3살 연상이지요. <1997년 가을에 패션 디자이너를 만났어요. 3년 정도 살다가 2001년에 헤어졌어요. 박영규가 아내의 병간호를 헌신적으로 했었는데요. 그러나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아내가 이랬어요. 건강할 때도 아내 노릇을 제대로 못했는데 자신이 없다. 마음 편하게 투병하련다. 당신 편하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진 것이 잘못전달되어 세번째 부인 때문에 두번째 이혼을 했다는 루머가 나오기도 했지요.


박영규 아들 사망이유

그런데 2004년 박영규는 큰 변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아들 박달의 갑작스러운 사망 사고 때문입니다. 아들은 당시 22살이었고, 미국에서 박영규 전부인과 유학 생활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그만 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충격으로 박영규는 잠정저긴 은퇴를 하고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지요. <아들을 잃고 충격을 너무 받아 모든 것을 피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왜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했다.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박영규는 상을 탈 때마다 수상소감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는데요. 2014년 KBS연기대상 우수 연기상을 수상하고 <이런 좋은 날에는 항상 보고 싶은 하늘에 있는 우리 아들이 생각난다. 우리 아들에게 열심히 살아가는 아빠 모습을 보여주려고 열심히 살고 있다. 내가 열심히 갈고 닦아서 빛나면 그 빛이 하늘로 가서 아들이 아빠를 보고 싶을 때 얼른 찾아보라고 노력하며 살았다>



기분 좋은 상패를 들고 우리 아들을 위해서 노래 한곡 하겠다라며 축배의 노래를 열창했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가족 여러분, 내년에 힘차게, 용기를 잃지 말고 삽시다>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 큰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박영규 3,4번째 재혼

박영규 3번째 결혼은 잠정 은퇴 후 필리핀으로 떠나 사업을 하던 중에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2004년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났다. 아들 사고 때도 아내가 같이 있어줬다. 옆에서 많은 힘이 되어줬다>


세번째 아내 김수륜은 정호영의 전처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인데요. 이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의 전남편이 누군지 잘 몰랐다. 지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 일에 신경쓰기보다 내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그 사람 삶을 내가 지켜줘야죠. 정말 좋은 사람인데 안타깝네요>



그런데 박영규는 네번째 결혼을 발표하면서 세번째 이혼을 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었는데요. 박영규는 필리핀에서 전부인 김수륜과 함께 여러 사업을 했는데 이것이 잘 안되어 이에 따른 갈등으로 이혼을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혼이유(이혼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지요.


박영규는 2019년 크리스마스에 네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박영규 재혼 상대는 비연예인으로 가족과 지인 30여 명에게만 청첩장을 돌리고 조용히 예식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비연예인 배우자를 배려해 조용히 결혼식을 치뤘다> 


이런 그의 인생사를 보면 정말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영규는 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을 통하여 제 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데요. 그가 앞으로는 실패 없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길 바라며, 대중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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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미는 현재 드라마 사풀인풀을 통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해미는 항상 드라마나 뮤지컬 무대에서 항상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요. 이 때문에 박해미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연기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박해미에 대한 좋은 평가가 많이 있지요.



박해미 프로필

박해미 나이는 1964년 1월 28일생으로 대전 출신입니다. 박해미는 부산영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성악과 졸업 후 1984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데뷔를 했습니다.


박해미는 오랫동안 뮤지컬배우로 활동을 했지만 브라운관에서는 무명배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2005년 드라마 하늘이시여로 시작하여 2006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출연을 하면서 인지도를 얻게 됩니다.



박해미 전남편 결혼이유

박해미는 대학교 4학년때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요. 전남편 임모씨였습니다. 당시 박해미 전남편 직업은 대기업 직원이었다고 합니다. <전남편이 처음에는 교문에서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요즘말로 치면 마치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지난 2005년 발간한 박해미 자서전 <도나의 노래>에서 전남편과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서 상세하게 언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남편에게 한 건물의 계단에서 무차별 관계를 당해 시대적 상황 탓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전남편과 결혼한 뒤 폭력과 가난에 시달렸다. 전남편은 한없이 선한 얼굴로 용서를 구하고 더할 나위 없는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통에 그때부터 강제 애인이 되었다> 결국 전남편의 의처증과 혹독했던 시댁 살이로 결국 이혼을 했다고도 언급을 했습니다.(박해미 이혼사유) 박해미 첫번째 남편 사이에는 아들 1명이 있습니다.


박해미 남편 황민 결혼이유

박해미는 공연에서 남편 황민을 만나게 됩니다. 박해미 친정 집안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는데, 황민 역시 당시 기준으로 15년 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갔던 재캐나다 교포였습니다. 박해미의 각시 품바 공연때 처음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황민 직업은 미국 UCLA에서 의대를 다니다 캐나다에서 화공학을 전공했지요. 각시 품바 공연 무대에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공연이 끝난 뒤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캐나다 이민이라는 공통사로 서로 가까워지게 되지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려 만나다가 동거를 하게 되고, 동거 5~6년만에 박해미가 임신을 하게 됩니다. <2000년 초였어요. 제가 외국 맥주회사에 다닐 때였는데 갑자기 아내가 임신 소식을 알렸어요. 아 나를 위해서 드디어 아기를 가져줬구나라는 생각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러나 황민 집안에서 8살 연상의 이혼녀 박해미와의 결혼을 처음에는 반대했습니다.


<아내와 동거하는 동안 캐나다의 부모와 의절하고 지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박해미와 황민 사이에 아들 황성재가 태어나면서 황민 집안에서도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박해미 남편 황민 이혼이유(이혼사유)

황민은 박해미와의 결혼 후 뮤지컬 배우이자 제작자로 활동을 하며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주운전 사고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었는데요.



황민은 지난 2018년 8월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에서 면허취소 수준의 만취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를 내 동승자 2명을 숨지게 했습니다. 당시 혈중알코올농도 0.104%로 면허 취소 수준이었으며 시속 167km로 차를 몰며 사고를 낸 것으로 파악되어 대중들의 큰 비난을 받았지요.


이로 인한 갈등으로 박해미 황민은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숨어 있는게 아니라 피해있었다. 어떻게 해결할까 물 한모금이 안 넘어갔다. 자식 죽은 엄마 심정이 있어서 힘들었다. 남편에 대한 걱정보다 죽은 아이들의 대한 걱정이 컸다. 그 부모님들 생각하니까 가슴이 아팠다>


<저는 돈을 쫓지 않았다. 돈이 나가도 아프지 않았다. 전혀 괜찮다. 오히려 제가 고통을 맞이하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전남편과 인연의 고리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다시 시작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을 했고, 전남편과 합의하에 이혼을 하게 되었다. 조금 힘든 상황도 있었지만 정리를 했다.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음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부딪쳤다. 감정의 골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유튜브 채널 <이진호 기자싱카>에서 보도된 이혼 이유가 음주운전이 결정적인 계기였나라는 질문에 박해미 측근은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게 음주 관련해서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공인이고 아들이 있으니 참고 살았다. 아들도 황민을 아버지로 인정 안하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크게 실망한 것 같다. 음주 문제만 아니면 괜찮은 사람이다>



<황민이 협의 이혼 해줄테니 위자료를 달라고 요청했다. 황민이 특별한 수입이 없지 않나? 박해미도 같이 살았던 사람이고 생활을 하려면 위자료가 필요할 것 같으니 지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위자료를 주기로 협의했고 그중 일부를 지급한 상태이다. 정확한 금액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박해미는 황민 음주운전 사고 피해자들에게 위로금과 보상금을 모두 지급하려 집까지 내놓았다고 알려졌지요. 황민을 대신하여 박해미가 모든 것을 보상한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까지 가게 된 것이지요.



박해미는 이혼 이후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야 겠다고 생각한 박해미는 공백기 이후 드라마와 뮤지컬 출연, 예능 등에 복귀를 하면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박해미에게는 아직까지도 큰 상처가 남아 있을텐데요. 그녀가 이를 잘 극복하고 이제는 웃는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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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1일 삼일절을 맞이하여 삼일절 기념식을 갖는 자리에서 각 국의 언어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독립선언서 원문을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수어 그리고 현대어로 다시 쓰여진 쉽고 바르게 읽는 독립선언문으로 낭독을 한 것인데요.


이날 일본어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세종대학교 교수 호사카 유지 교수에 대해서 무척 궁금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어로 독립선언서를 읽는 일본인이라면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호사카 유지 교수 국적

호사카 유지 나이는 1956년 2월 26일생으로 일본 출신입니다. 학력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이며, 1988년부터 대한민국에 거주를 했습니다.


호사카 유지 국적은 한국인데요. 2003년 대한민국으로 귀화를 했지요.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 도쿄 대학교 금속공학과 재학 중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한 내용을 접해서 일본이 왜 한국과 아시아를 침략했는가 하는 의문을 풀기 위해 졸업 후 대한민국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을 하게 되지요.



9개월간 한국어학당에 입학하여 한국어를 연수하고 198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에 편입학하게 됩니다. 편입학하여 1년간만 다니면서 대학원 진학을 위한 선수과목을 이수했으며, 1990년 3월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 석학사 과정을 마치고 1998년부터 세종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나빠지면 항상 인터뷰도 하고, 바빠진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일본 역사 왜곡을 잘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최고 엘리트 출신의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뼛속까지 한국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한국을 공부하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이 생겼고, 잘못된 일본 역사 왜곡 문화를 조금이라도 바로 잡기 위해서 한국으로 귀화를 한 것을 보면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호사카 유지 부인(아내) 국적

호사카 유지 아내는 한국인입니다. 한국인 부인을 맞이하기 위한 호사카 유지의 노력도 상당했다고 하는데요. 처가에 인사를 하러 갔을 때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호사카 유지 부인 집안은 전주 이씨로 일본인 사위를 맞이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 때부터 호사카 유지는 처가 집안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장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편지로 자신의 생각과 한국에 있는 이유를 이야기하며 장인이 호사카 유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려 2년의 시간 동안 설득을 했다고 하는데요. 마음을 열고 난 다음 누구보다 장인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지요.



반면 호사카 유지 집안에서는 한국인 며느리를 처음부터 반겼다고 하는데요. <부모에게 아내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일본에서는 이렇게 좋은 여자 못 만날 거라고 하더라>



호사카 유지 개명 않는 이유

한국인이 된 호사카 유지. 그러나 호사카 유지는 이름만은 일본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으로 귀화를 했지만 일본식 이름이 독도를 한국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호소력 있어 보여서 개명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호사카 유지는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독도 지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민감한 문제를 다루다보니 일본 극우세력의 협박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애국심이 강하고, 대한민국을 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활동을 앞으로도 응원하며 나 역시 우리나라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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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클라쓰에서 최고의 악역이자 욕나오게 만드는 캐릭터라고 한다면 장가의 후계자 장근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매회 이태원클라쓰를 시청하다보면 어떻게 저렇게 악역 연기를 잘하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데요.


악역을 통하여 연기력 극찬을 받고 있는 안보현의 미래가 상당히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안보현의 연기력에 놀라 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데요. 안보현은 누구일까요?



안보현 프로필

안보현 나이는 1988년 5월 16일생입니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고향은 부산광역시이며 소속사는 FN엔터테인먼트이지요.


안보현은 부산체육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경대학교 모델과를 졸업했는데요. 큰 키 때문에 모델을 지망했고, 오랜 모델 활동 끝에 배우로 전향할 수 있었습니다.



안보현 키는 187cm로 지난 2007년 서울컬렉션을 시작으로 카루소, 제너럴아이디어, XESS, 데무, 아레나, 맨즈헬스 등 여러 잡지의 모델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가수의 뮤직비디오 등에 출연을 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했는데요. 2014년에는 가수 펜토의 신곡 <파스타 헤어터>의 뮤직비디오에 안보현이 출연을 하기도 했지요. 우월한 키에 깔끔한 정장을 입고 배우 김수현을 연상시키는 닮은꼴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안보현은 김수현뿐만 아니라 모델 김영광을 닮은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안보현은 부산체육고등학교 시절 복싱선수로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 뮤지컬 <폭풍의 언덕>에도 출연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끼를 가지고 있지요.


안보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작품은 2016년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임광남(임중사) 역을 통해서입니다. 이후 연극이 끝나고 난뒤, 독고 리와인드, 반야, 숨바꼭질, 그녀의 사생활 등에 연이어 출연을 했고 점차 연기력을 인정 받으며 이태원 클라쓰를 통하여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보현: <태양의 후예에서 송중기가 소속된 부대 군인으로 출연하고 있다. 운이 좋게도 6개월 촬영했고, 최고의 연인이라는 일일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


안보현: <제가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주인공으로 촬영했떤 <히야>가 개봉한다는 게 너무 큰 기쁨이다. 첫 스크린이다보니 아직 저 자신에게도 기대되는 2,3월인 것 같다>



안보현 김우빈 절친

모델 출신답게 안보현은 김우빈과도 절친이라고 합니다. 모델학과 입학에 앞서 한 대학교 모델학과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김우빈을 만났다고 합니다. 당시 안보현은 19세, 김우빈은 18세였지요.



<그 때 저는 운동복 밖에 없었는데 우빈이가 옷도 빌려주고 하면서 도움을 받았어요. 저는 그렇게 모델학과에 진학을 했고, 우빈이는 또 다시 그 프로그램에 왔더라고요. 모델학과에 꼭 진학하고 싶어 했거든요. 그리고 스무 살이 된 우빈이는 제 후배가 됐죠. 그렇게 더 친해졌고, 그때 인연이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무래도 우빈이가 연기 선배다 보니까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다. 조언도 많이 해주고 제 편에 서서 응원도 많이 해준다. 동생이지만 엄청나게 좋은 자극제가 된다. 저한테는 든든한 톱스타 친구다. 제가 군입대할 때 유일하게 와주기도 했다. 언제나 좋은 기운을 많이 받는다>



안보현 이태원 클라쓰

안보현은 인태원 클라쓰에서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안하무인 후계자 장근원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동시에 아버지 장대희(유재명)의 앞에서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섬세한 내면 연기로 표현하며 다양한 모습을 무척 현실감 있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지난 10회에서는 처음으로 부자간의 정을 느끼게 해준 장대희 회장이 후계자로서 자신을 버린 사실을 알게 되며 기자회견 장 앞에서 선보인 내면적인 감정 연기는 또 다른 장근원의 탄생을 알리기도 했지요.


이태원 클라쓰의 안보현은 반전 매력이 상당히 돋보입니다. 어떨 때에는 무척 악랄하면서도 강자에게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배신감과 슬픔이 담긴 표정과 힘있는 연기는 시청자들의 감정까지 흔들며 극의 몰입감을 더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태원 클라쓰에서 악역 연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표독스럽게 분장을 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잘생기고 멋스러움이 충분한 배우입니다. 지금처럼 좋은 연기를 앞으로의 작품에서도 보여줄 수 있다면 충분히 대성할 수 있는 배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아태원 클라쓰에서 안보현의 연기을 보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 또 다른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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